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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코이노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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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코이노니아 공동체 영성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오늘은 ‘코이노니아 공동체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이노니아(Koinonia)란 우리 말로 사귐, 교제, 친교 등으로 번역됩니다. 성경에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란 다양한 인격이 만나 하나로 연합되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차 한 잔 같이 음식 한두 번 같이 먹는 정도의 교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일체를 이루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성경적 원리에서 볼 때 이 코이노니아란 말이 엄청 중요한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 자신이 코이노니아 하나님입니다. 인간도 코이노니아를 본질로 하는 존재요, 교회도 코이노니아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 상호간의 관계, 회복된 교회 공동체 등 기독교의 영성은 한마디로 코이노니아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인간은 어떻게 지음 받았습니까? 

1.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인 ‘우리’ 이미지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한마디로 인간을 지으실 때 누구를 모델로 한 겁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피조물 중에 사람만 영이신 하나님과 친교하며 대화하고 사랑하며 신뢰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대화의 상대로, 하나님의 친교의 상대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은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성적 존재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온전히 일체가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면서 세분이고 세분이면서 한분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신 하나님임을 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사역을 통해서 하나 됨과 일치됨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분이지만 한 분처럼, 한 분이지만 세분처럼 역할을 분담하여 사역을 하셨습니다. 

   가령, 구원사역에 있어서도 성부 하나님은 예정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며, 성령하나님은 우리로 믿게 하고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과연 하나님은 코이노니아의 하나님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 하실 때 단순히 ‘내 형상으로 만들겠다.’가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 즉 삼위가 일체로 존재하는 코이노니아, ‘우리’ 이미지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과 친교 하는 인간, 그리고 사람끼리 서로 친교 하며 하나 되어 살아가는 코이노니아 영성으로 지으셨습니다. 결코 지금처럼 따로 따로 모래알처럼 개인주의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로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방식입니다. 

   최초의 부부인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보십시오. 아담은 하와를 보고 감격하였습니다. 

(창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이 고백은 하나된 코이노니아의 기쁨이요, 감격을 보여줍니다. 둘이지만 한 몸을 이루어 일체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결혼이야말로 한 몸을 이루는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경험입니다. 부부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하나 되는 코이노니아 경험 속에 사랑하며 살도록 섭리하였습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인간 간에 진정한 사귐, 코이노니아 속에 살아갈 때입니다. 이것이 코이노니아의 영성, ‘우리’ 이미지를  회복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2. 마귀가 코이노니아의 형상, 즉 ‘우리’ 이미지를 파괴시켰습니다. 

   성경은 인간 창조와 함께 타락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마귀가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파괴시키려 한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 ‘우리’ 이미지를 파괴시키려 한 겁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된 코이노니아와 인간 서로간의 하나된 코이노니아를 파괴하려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인류 최초의 비극인 타락 이야기는 한마디로 코이노니아의 파괴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뱀의 말을 믿음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오히려 뱀을 신뢰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하나님을 불신할 수 있을까요? 불신은 코이노니아를 파괴하는 독소입니다. 그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파괴됐습니다.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사랑의 관계, 코이노니아 관계에 있을 때 같으면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두려움이 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야 하는 비극이 된 겁니다. 코이노니아가 깨졌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불행한 존재가 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간관계도 파괴됐습니다. 한 몸이었던 아담과 하와 사이도 인정사정없이 파괴됐습니다. 코이노니아 영성이 파괴되기 전에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지요. 그러나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파괴되면서 인간의 본질인 ‘우리’ 이미지가 파괴됐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사이에 코이노니아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담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제는 ‘우리’가 아닙니다. ‘여자 그가’로 전락됐습니다. 몇 인칭입니까? 3인칭, 즉 제 삼자가 돼버렸습니다. 누가 ‘우리가 남이가’라고 했다던데 진짜 남이 돼버렸습니다. 여기 혹시 이런 부부 없습니까? 누가 뭐라고 하면 ‘그 사람보고 물어보세요.’ ‘ 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요.’ 이런 말 쓰면 됩니까? ‘우리’ 이미지를 잃으면 안됩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형인, 가인이 시기와 질투로 아우인 아벨을 쳐 죽이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이미지가 파괴된 실상을 봅니다. 동생을 죽이고 난 후 가인의 말입니다.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 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마귀는 지금도 코이노니아의 영성, ‘우리’ 이미지를 파괴시키려고 혈안이 돼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3. 예수님은 파괴된 코이노니아 영성을 회복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성인 코이노니아 인생,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회복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한 십자가요, 인간 서로간의 장벽을 허무는 십자가입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중보기도의 내용을 보면 바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회복하시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장차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제자들이 하나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신 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제자들도 하나 되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신 겁니다. 창조 시에 하나님이 만든바 하나님의 형상, ‘우리’ 이미지가 회복된 제자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도하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파괴된 코이노니아를 회복하기 위한 겁니다. 이런 회복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게 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진정한 연합의 코이노니아적 새 인간을 지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고 교회를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회복한 공동체로 세우고자 하신 겁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주님은 기도하신 겁니다. 

(요 17:11)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과도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제자들도 공동체로서 하나 되어 서로 간에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신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 되고 인간 서로 간에 하나 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룰 때 세상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요 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 화평교회에서 이런 모습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전도의 목적이 이 코이노니아를 이루려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한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 전하는 목적을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귐이 코이노니아인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우리’라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들어와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게 하는데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순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코이노니아 공동체의 지체가 되어 코이노니아 영성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그 사귐은 인간들만의 사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요,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 되는 코이노니아라는 겁니다. 

   이 코이노니아가 회복된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코이노니아 영성입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코이노니아 공동체로 신앙생활을 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코이노니아 영성을 상실한 교회가 많습니다. 코이노니아 영성을 뒤로 하고 개인적 영성을 추구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고 수도적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영성은 형제들과 연합하는 교제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 교회의 생활은 이 깊은 코이노니아 영성을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안도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나 홀로주의가 만연돼 있습니다. 여기에서 셀교회의 과제가 있습니다. 

4. 셀교회는 코이노니아 공동체 영성의 회복을 추구합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그 작은 단위의 가정 모임에서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공동체적 삶이 경험 되고 있었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서로 삶을 나누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 체험하며 기적과 치유를 공유하는 교회였습니다. 

   이 같은 소그룹 속에서 온전한 코이노니아가 가깝게 경험되어 교회의 본질이 경험됨으로써 교회는 생동감 있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고 증인 공동체가 되고 선교 공동체가 되었던 겁니다. 교회의 본질로서의 코이노니아를 회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소그룹, 셀이 활성화 돼야합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소그룹, 셀을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아십니까?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코이노니아 영성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연약한 형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소그룹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는 것 그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여러분은 혼자는 기도하지만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해봤습니까? 반드시 셀모임에 참석해서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약속은 두 세 사람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믿고 순종하십시오. 이렇게 될 때 온전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집니다. 인간끼리, 즉 신자들 끼리 하나 되고 거기에 주님이 오심으로 하나 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우리 화평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화평의 성도들 모두가 셀모임에 기쁘게 참석하여 주님 모시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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