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펌]욥기 강해 13장 - 17장

욥기 강해설교(11)  


소발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I): "돌팔이 의사들 같으니라고" <욥 13: 1-19>


본 문 말씀은 욥이 소발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계속해서 응답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욥은 매우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더불어 무익한 논쟁을 하는데 지쳐버려서 하나님을 향하여 직접 항의하겠다는 것입니다. 친구라는 것들이 다 속 터지는 소리만 하고 있는 것에 염증을 느껴서 이제 직접 하나님께 진실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속사정을 다 털어놓고 이 부조리한 고난에 대한 이유와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따지고 싶다는 것이지요.


1. 친구들에게서 하나님으로(13: 1-12)


지 금까지 전개되어온 첫 바퀴 논쟁을 살펴보면 친구들은 항상 일방적이었습니다. 선생인 냥 훈계하고 교정하는 방식으로 욥을 마구잡이로 몰아 부쳤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고통 없이 안일한 입장에서 까닭을 알 수 없이 고통 당하는 욥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욥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친구들을 향하여 포문을 엽니다. 1-2절을 보세요. 친구들이 말하는 것들을 욥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또렷이 들어서 다 아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이런저런 이론들을 늘어놓는데 욥도 친구들 못지 않게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게 괴롭다는 실존적 현실이 문제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극심한 고통이 그 앎을 순순히 용납하지 않는다는데 괴로움이 있는 것이지요!


이 렇게 어설픈 지식으로 욥을 심문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은 돌팔이 의사나 다름없습니다. 4-5절을 보세요. 친구들은 무식을 거짓말로 때우는 사람들이요 돌팔이 의사 같다는 것, 아닙니까? 모르면 차라리 입이라도 다물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입까지 나불거리니 도무지 진리와 거리가 멀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들이 몰라서 놓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정통 신학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에 대해서 무지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무지한 것은 이런 이론들이 자기처럼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복잡한 현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의과대학 말년차의 수련의와 법과대학 말년차의 법률 수련생이 아직 임상 경험이 부족해 이론만 가지고 환자와 고객을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학 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제 경험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의학이나 법률 이론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기계적으로 척척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한 예외가 부지기수로 산재해 있습니다. 좋은 의사와 좋은 법률가는 이와 같이 다양하고 복잡한 임상 현실에 대한 매우 심층적인 이해와 경험을 통하여 점점 더 훌륭한 의사와 율사로서 성숙해집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렇게 의대에서 배운 의학 지식을 가지고 일반적인 의학 상식을 벗어난, 아주 희귀한 질병을 앓는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선 수련의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그들은 욥을 이 질병에서 고친다고 호언하지만 더 큰 아픔만 안겨줄 뿐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친구들은 돌팔이 의사와 진배없는 것이지요.    


또 한 욥이 보기에 친구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도덕적 인과율로 고난을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훨씬 더 복잡한 이 세상의 현실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는 허위요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들의 말을 '허튼 소리'요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을 빌미 삼아 던지는 알맹이도 없는 말'이요(13: 7), '한낱 쓸모 없는 잡담일 뿐이요' '흙벽에 써 놓은 낙서'(13: 12)에 불과하다고 혹평합니다. 이들도 양심이 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사람이 원치 않는 고난을 받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의한 사람이 형통하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했을 터인데도 단지 하나님을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그 엄연한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다는 것이지요. 9-11절 말씀을 보세요. " 하나님이 너희를 자세히 조사하셔도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이듯, 그렇게 그분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거짓말로 나를 고발하면, 그분께서 너희의 속마음을 여지없이 폭로하실 것이다. 그분의 존엄하심이 너희에게 두려움이 될 것이며,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친 구들의 허위를 찌르는 통렬한 비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분명 부조리한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적어도 욥이 확신하는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바로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를 역사 안에 허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그렇지 않은 척, 은폐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온갖 위선과 만용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의 속마음까지 다 살피시는 하나님께 자기가 직접 대면해서 나서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전능하신 분께 말씀드리고 싶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다"(13: 3절).


2.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을 토로하는 욥(13: 13-19)


욥 은 친구들에게 자기의 운명을 맡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대면하면서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나섭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 매서운 결기(―氣=성이 나서 과단성(果斷性) 있게 내지르는 기상)가 있습니다. 14-16절 말씀을 보세요. " 나라고 해서 어찌 이를 악물고서라도 내 생명을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셔도,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내 사정만은 그분께 아뢰겠다. 적어도 이렇게 하는 것이, 내게는 구원을 얻는 길이 될 것이다. 사악한 자는 그분 앞에 감히 나서지도 못할 것이다." 여 기 보세요. 이제 재산도 가족도 다 잃어버리고 목숨 하나만 달랑 남았으니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진실을 주님께 알리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충고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죽음을 무릎 쓰고 진실을 따지는 것이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마지막 남은 목숨까지도 친구들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당당히 맡기겠다는 의지이지요. 이것은 욥이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무죄성을 확신한데서 온 양심과 용기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사악한 자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서지도 못하겠지만 자기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자기의 결백을 아뢸 만큼 떳떳하기에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신고(辛苦)를 자기에게 허락하셨는지 기어코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이지요. "너희는 이제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나를 좀 보아라, 나는 이제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게는, 내가 죄가 없다는 확신이 있다"(13: 17-18). 이제 친구들을 제치고 하나님께 직접 따지는 욥의 다부진 모습을 지켜볼 차례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두 가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이 돌팔이가 아닌가 자문해봐야 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설프게 아는 우리의 지식으로 이웃을 어렵게 한 적은 없는지요? 깊은 고뇌와 실제적인 경험 없이 단지 이론만 가지고 이웃을 함부로 판단한 적은 없는지요. 저 역시 옛날을 돌아보면 돌팔이라는 자괴감(自愧感) 이 듭니다. 새파란 목회 초년병 시절 어줍잖은 신학 지식을 가지고 목회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사람들을 판단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연륜이 쌓이다 보니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도양단(一刀兩斷=칼로 쳐서 두 동강이를 내듯이 어떤 일을 선뜻 결정함)식으로 흑백논리로 판단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양한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문제, 다양한 경험을 안고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마다 형편과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딱 정해진 법칙은 없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부분만 보고 그 사람이 "믿음이 있다, 없다,"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판단하는 일을 점점 더 유보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섣부른 오만과 편견은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금 더 알고 더 의롭다는 교만과 착각으로 이웃을 오도하는 돌팔이, 우리는 돌팔이가 되어서 안될 것입니다!


둘 째로, 진리를 알기까지 결사각오로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뢰고야 말겠다는 욥의 치열한 정신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몸을 죽여 인(仁)을 이룸. 즉,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림)이라는 말도 있지요. 옳은 일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는 말이지요. 욥은 자신이 왜 이렇게 부당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친구들로부터는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상처를 치료한다고 공언하면서 "괜찮다! 괜찮다!"고 거짓말을 외치듯이(렘 6: 4; 8: 11) 친구들의 말이란 욥의 고통과는 아랑곳없이 내뱉는 쓸모 없는 잡담이요 흙벽에 갈겨 쓴 낙서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욥은 마지막 하나 남은 목숨마저 잃더라도 자신의 걸어온 발자취를 하나님께 낱낱이 털어놓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오늘 우리도 사느냐 죽느냐 하는 우리 운명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과 대면해 깨달을 수 있는 정직과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욥기 강해설교(12)  


소발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II): "물이 말라버린 강바닥처럼" <욥 13: 20-14: 22>


친 구들과의 대화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욥은 하나님께 자기 문제를 들고 갑니다. 하나 남은 목숨,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겠다고 다짐합니다.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의 이유와 의미를 친구들이 아닌, 이 고난의 궁극적 원인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직접 따지겠다는 것이지요. 본문 말씀은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속사정을 토로하는 기도문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감싸주시던 모든 울타리가 쓰러졌고 일체의 희망이 사라진 현실을 고발하는 동시에 회복과 갱신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묻고 있습니다.


1. 욥의 두 가지 기도(13: 20-14: 6)

  

욥은 하나님과 다투기 전에 사전의 안전보장 형태로서의 두 가지 기도를 주님께 드립니다. 21절을 보세요. "나를 치시는 그 손을 거두어 주시고, 제발, 내가 이렇게 두려워 떨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자기 문제를 토로하려면 건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고 극한 고난에 빠진 자기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야 하며 두려움에 빠진 자기를 건져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따지겠다는 태도가 결코 용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두려움도 함께 섞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와 더불어 욥은 하나님께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13: 23절을 보세요.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욥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면 도대체 자기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 묻습니다. 이러한 물음을 신학적으로는 부당한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따진다는 뜻에서의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고 부릅니다.


욥 이 친구들을 제치고 하나님께 직접 따지게 된 동기는 자신의 결백성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통이 자신이 지은 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부당한 고통이라고 하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욥은 자신이 태생적으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천사와 달리 완벽하지 못한, 그리하여 피조물로서 숙명적으로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태생적 연약함까지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허물이 있음을 자인합니다(7: 21; 13: 26 참조).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욥이 이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요점은 욥이 당하는 고난이 자기가 지은 죄와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비대칭적인 고난이라는 사실이지요! 그 당시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던 도덕적 인과율에 비추어보더라도 상대적으로 더 경건하고 의롭게 산다고 자부하던 구태여(=애써 굳이. 일부러) 욥만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과도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욥은 "이게 아니다!"라는 확신만 더 해 갔으며 마음 깊은 곳에 반발심만 커져갔습니다. 이렇게 욥이 하나님 앞에 무죄를 주장할 때 인간의 선천적 한계성에서부터 오는 원죄성까지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백한 욥을 지금 어떻게 대하십니까? 13: 25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욥을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대하시고 '마른 지푸라기'같이 욥을 공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줄곧 자기를 위협하는 원수처럼 대하신다는 것이지요. 또한 28절을 보세요. 욥은 하나님 앞에 '썩은 물건'과도 같고 '좀 먹은 의복'과도 같다고 탄식합니다. 욥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조사하시더니만 마침내 쓰레기처럼 대하신다는 푸념이지요. 또한 14: 2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욥을 '시드는 꽃'같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여기십니다. '낙엽,' '마른 지푸라기,' '썩은 물건,' '좀 먹은 의복,' '시들어버린 꽃,' '사라지는 그림자,' 등의 이미지들은 하나님에 의해 저 밑바닥에까지 내동댕이쳐진 욥의 처참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이와 같이 막다른 골목에 까지 내몰린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피력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셔서 그가 숨을 좀 돌리게 하시고, 자기가 살 남은 시간을 품꾼만큼이라도 한 번 마음껏 살게 해 주십시오." 조금이라도 안식할 수 있는 여유를 달라고 간청합니다.


2. 욥이 꿈꾸는 한 줄기 희망(14: 7-22)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욥은 그러나 이제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14: 7-9절에서 욥은 나무의 경우를 희망의 본보기로 들고 있습니다. " 한 그루 나무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찍혀도 다시 움이 돋아나고, 그 가지가 끊임없이 자라나고, 비록 그 뿌리가 땅 속에서 늙어서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어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 우리는 욥기를 읽으면서 저자가 동물이나 식물 등 자연세계에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나무도 찍혀서 다 죽게 생겼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린 가지를 뻗어 물기운만 빨아들일 수 있다면 다시 소생할 수 있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여도 다시 싹이 트고 가지를 내어 살아납니다. 물기운만 있으면! 여기서 욥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마침내 목숨까지도 깜빡깜빡 기울어 가는 자신의 운명 앞에 수액의 영양분으로 다시 소생하는 나무 이미지에 희망을 겁니다.


아, 그러나 인간은 나무와 다릅니다! 여기에 욥의 희망은 다시 사그라지기 시작합니다. 14: 10-12절을 보세요. " 그러나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한 번 죽으면 사라지게 되어 있고,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물이 말라 버린 강처럼, 바닥이 드러난 호수처럼, 사람도 죽습니다. 죽었다 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늘이 없어지면 없어질까, 죽은 사람이 눈을 뜨지는 못합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무는 수액을 통해 잘도 살아나는데 인간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천하장사라 할지라도 한번 죽으면 다시 살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욥은 다시 직시합니다. 나무에게는 수액이 생명을 줄 수 있지만 인간의 경우 일단 죽은 다음에는 물이 말라버린 강처럼, 바닥이 훤히 드러난 바닥처럼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생명의 물이 다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설령 하늘이 없어진다 해도 죽은 사람은 소생할 방도는 없다! 자, 그렇다면 죽음에 처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욥 기에서 죽음은 창조와 더불어 아주 중요한 주제를 이룹니다. 창조가 존재의 출발점이라면 죽음은 존재의 귀결점이 되는 까닭에 욥이 탄식할 때마다 이 두 축을 왔다 갔다 합니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상황종료를 의미하기 때문에 죽음으로서 욥은 현재의 고통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만사가 끝장나는 인간에게 희망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욥은 스올에로의 은닉을 꿈꿉니다. '스올,' 다른 말로 음부(陰府)는 구약에서만 65회나 사용되었는데 사람이 죽어서 들어가는 지하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스올의 개념이 나중에 신약에 가서는 무저갱(無底坑)과 지옥의 개념으로 발전해나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스올은 선악에 따른 형벌과는 무관한 사자(死者)의 대기 장소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욥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칠 때까지 스올에 숨어 들어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욥의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지긋지긋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스올에 숨어 있도록 배려하시는, 그런 분이 되셨으면 좋겠다는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공격과 진노가 멎을 그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스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욥은 스올에 숨어 있으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자신을 다시 기억하여 회복하실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욥을 다시 기억하시는 날 욥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될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스올에서의 은닉에 희미한 기대를 겁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4: 13-15절을 보세요. " 차라리 나를 스올에 감추어 두실 수는 없으십니까? 주님의 진노가 가실 때까지만이라도 나를 숨겨 주시고, 기한을 정해 두셨다가 뒷날에 다시 기억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아무리 대장부라 하더라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좋은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고난의 때가 지나가기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시면,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손수 지으신 나를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스올에 있는 욥을 다시 기억하시는 날 14: 17절의 말씀처럼 주님은 욥의 허물을 자루에 넣어 봉하시고 잘못을 덮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다시 한번 냉엄한 현실로 돌아올 때 무참하게 꺾이고 맙니다. 14: 18-20절에 보면 주님은 마치 "산이 무너져 내리고, 큰 바위조차 제자리에서 밀려나듯이, 물이 바위를 굴려 내고 폭우가 온 세상 먼지를 급류로 씻어 내듯이," 연약한 자신의 희망도 그렇게 사정없이 끊으신다고 탄식합니다. 물론 희망도 하나의 상상적인 가정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희망의 사라짐 역시 상상 속에서 이렇게 덧없이 허물어져 갑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욥 이 극심한 고난의 현실 앞에서 스올에 한 가닥 기대를 건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현실이 너무 고달파서 나온 심리적 도피주의로 쉽게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묵시록을 보면 현재 부당하게 고통 당하는 성도들에 대한 종말의 날에 주어지는 보상이 약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욥기는 묵시 문학의 발전 과정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오늘 우리가 이유를 모르는 부당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허용하실 뿐, 의의 최후 승리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계 22: 11-12절은 말씀합니다.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우리는 부조리한 고난을 당할 때마다 의의 최후 승리가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 나무가 비록 찍혀 죽어가더라도 수액만 빨아들이면 움이 트고 잔가지가 돋아나 다시 소생하듯이 고난 당하는 우리가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할 때 고난은 결국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욥기 강해설교(13)  


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박: "하나님께 종주먹질을 하는 사나이여"  <욥 15: 1-35>


15-21 장까지는 세 친구들과 욥 사이의 둘째 마당의 설전이 나옵니다. 3-14장까지의 첫 바퀴 논쟁이 끝난 뒤 다시 1번 타자 엘리바스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바스는 그 이름이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데만 출신으로서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입니다. 엘리바스는 세 친구들 중에 제일 연배가 높았으며 학식도 있고 그런 대로 점잖은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욥이 첫 번째 마당의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예의, 그 온유함을 잃고 점점 공세적이고 정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본 문에 나오는 엘리바스의 논리는 4-5장에서 피력한 첫 번째 발언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 당시 두루 통용되었던 도덕적 인과율을 욥의 경우에도 줄기차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은 도덕 질서가 자리를 잘 잡고 있기에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선인은 보상을, 악인은 응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지요. 엘리바스는 이러한 대원칙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세상에 척척 작동한다고 확신하기에 욥의 결백성에 대한 변명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반드시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께 이실직고(以實直告)하여 용서를 빌어야만 합니다. 그 것 만이 욥이 살길입니다. 이렇게 엘리바스는 욥이 현재 재난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과거에 죄악을 심었음에 틀림없다는 단정적인 논리를 전개해나갑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맹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없는 사람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와 하나님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과거로부터 전수받은 인과응보의 신학논리로 "죄없는 사람도 고난 당할 수 있고 죄있는 사람도 번성할 수 있다." 는 너무도 엄연한 경험적 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모두 내리신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마 5: 45 참조). 이러한 태도야말로 교조주의적, 율법주의적이며 창기와 세리같은 중죄인들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식탁으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은총과 사랑에 정면 배치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바스의 논리에서 이러한 위험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욥을 불경건하다고 공박하는 엘리바스(15: 1-16)


욥 은 신학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 체험으로부터 말했습니다. 무죄한 사람도 재앙을 만날 수 있다는 경험적 사실을 친구들과 하나님께 힘써 변증했습니다. 그러나 온화한 것처럼 보였던 엘리바스도 이렇게 집요하게 자기 결백을 주장하는 욥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따지는 욥을 향하여 불경건하다고 공격합니다. 4-5절을 보세요. "정말 너야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뉘우치며 기도하는 일조차도 팽개쳐 버리는구나. 네 죄가 네 입을 부추겨서, 그 혀로 간사한 말만 골라서 하게 한다." 욥이 하나님을 위협하여 경건성 그 자체를 손상시킨다는 비난이지요.


이제 엘리바스는 욥이 주장하는 자기만의 내밀한 지혜에 대해서도 공박합니다. 7-9절을 보세요. " 네가 맨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기라도 하며, 산보다 먼저 생겨난 존재라도 되느냐? 네가 하나님의 회의를 엿듣기라도 하였느냐? 어찌하여 너만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느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너 혼자만 알고 있기라도 하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그 무엇을 너 혼자만 깨닫기라도 하였다는 말이냐?" 이 것은 12: 2-6절에서 욥의 친구들이 마치 지혜를 전세라도 낸 것처럼 구는 것을 반박한 내용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 때에는 욥이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들만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힐난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엘리바스가 욥이 지혜있는 척한다고 공격의 날을 세웁니다. 나란히 달리는 철도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양쪽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더 재미있는 것은 10절에 보면 욥이 마치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난 사람처럼 구는데 자기들 가운데에는 욥보다 훨씬 나이가 더 많은 머리 센 사람도 있고 욥의 아버지보다 더 연장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이 지혜도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요. 엘리바스는 이제 나이까지 들고나와 욥이 지혜있는 척 하는 것을 꾸짖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이 씻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예 단언하고 있습니다. 14-16절을 보세요. "인생이 무엇이기에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무엇이기에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들마저도 반드시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으신다. 그분 눈에는 푸른 하늘도 깨끗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하물며 구역질 나도록 부패하여 죄를 물 마시듯 하는 사람이야 어떠하겠느냐?" 여기 보세요. 엘리바스는 욥이 자신의 무죄성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을 듣고서는 천사들도 정결해지기 어려운데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말합니다. 이미 엘리바스는 4: 17에서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없다고 주장했었는데 욥의 죄있음을 물고늘어지기 위하여 다시 한번 이 진리를 힘써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욥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부인한 것은 자신의 태생적 연약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보편 타당하게 지니고 있는 원죄성에는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짓는 윤리적 죄, 즉 자범죄가 문제입니다. 적어도 욥이 100% 확신하는 것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지은 죄, 즉 자범죄에 비하여 그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불균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 번 엘리바스와 욥은 대화의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어긋나고 있습니다.


2. 욥과 같은 악인의 운명(15: 17-35)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인과응보론이라는 정통 신학을 더욱 예리하게 갈고 닦아 욥을 죄인으로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25-26절을 보세요. "이것은 모두 그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주먹을 휘두르고, 전능하신 분을 우습게 여긴 탓이 아니겠느냐? 전능하신 분께 거만하게 달려들고, 방패를 앞세우고 그분께 덤빈 탓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함부로 종주먹질을하고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엘리바스가 대대손손 현자로부터 전수받아온 한 점 오류도 없는 정통 신학이요 진리라는 것입니다(17-18절).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와 같은 악인들 중에는 욥도 포함됩니다.


그 렇다면 악인이 받는 고통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0-24절, 27-35절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분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들리는 소식이라곤 다 두려운 소식뿐이고 항상 칼이 목숨을 노리고 더 이상 앞날의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악인은 사는 집이 폐가가 되며 더 이상 부자가 될 수 없으며 가지가 불에 탄 나무처럼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가지가 불에 탄 나무,' '꽃이 바람에 날려 사라진 나무,' '마른 나뭇가지,' '익지도 않은 포도,' '꽃이 다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올리브 나무' 등의 이미지를 통하여 악인의 비참한 최후를 회화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렇게 엘리바스는 욥이 악인이기 때문에 악인이 받을 수밖에 없는 모든 고통을 지금 다 받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엘 리바스의 말은 참 화가 나게 만듭니다. 가족도 잃고 재산도 잃고 건강마저 잃어서 빈사 상태에 빠진 사람을 이렇게 까지 코너로 몰 수 있나, 자괴감이 듭니다. 엘리바스의 인과응보론이 결코 틀린 이론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맞아떨어지는 우주의 한 법칙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심연 속에 계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우주도 인과율로만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이론이 비록 옳다고 할지라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욥은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생각하고 엘리바스를 비롯한 세 친구들은 전통과 교리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반영하지 않는 추상적인 이론 신학이 고난당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하나, 오늘 기막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논리는 그 반대편에 있는 논리, 즉 오늘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은 다 선을 쌓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100%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교조주의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경우 세상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현실 경험은 이와 같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도덕적 질서를 부인하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실패한 사람, 등등, 주변으로 밀려난 모든 사람들을 당신이나 당신 조상이 지은 죄로 인해 이 고통을 당한다고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부자, 건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 등등, 중심부에서 떵떵거리는 사람들을 당신이 과거에 선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의 복락을 누린다고 말하는 것도 항상 진실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율법주의자와 비슷하고 욥은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썩 닮은 것처럼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죄있기 때문에 이 고통을 당한다고 몰아 부치는 세 친구들이나 과거의 전통을 따지며 현실의 모든 고통스런 경험을 율법이라는 좁은 문자 속에 가두어 해석하고 심판하는 율법주의자는 공히 깊은 고통의 나락에 빠져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욥기 강해설교(14)  


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 "너희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여"<욥 16: 1-17: 5>


엘 리바스를 비롯한 세 친구들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집니다. 처음에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욥을 위로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적대자로 바뀌어져갔습니다. 더 이상 욥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욥을 심문하고 정죄하는 심판자가 되어 갔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화만 종합해봐도 고난은 죄의 결과로서 온다는 원리가 이들에게 하나의 도그마(dogma= 독단(獨斷). 교회에서 부동(不動)의 진리로 인정되는 교리(敎理)·교의(敎義)·교조(敎條)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죄없는 사람이 고난 당하도록 방치하실 수 없습니다. 욥이 오늘 재앙을 당하는 것은 반드시 어제 욥이 지은 죄의 결과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욥에게 줄기차게 알리고 가르치려고 한다는 사실에서 이들은 예언자들이나 파수꾼들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겔 3: 17). 친구들은 욥으로 하여금 죄지어서 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 회개하도록 만들어서 예전의 경건자, 행복자로 되돌아가도록 외쳐야 하는 파수꾼의 사명을 자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러나 이렇게 예언자적이요 파수꾼적인 사명을 수행하다보니 이들은 어느새 위로자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심문자와 심판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해갔습니다. 욥이 더욱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를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대변자로 자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은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제 넘는 책망과 훈계로 일관하는 친구들에 대한 저항입니다.


1.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16: 1-6)


3 장 이후부터 전개되어온 담화를 살펴보면 욥의 응답은 친구들에게 먼저 한 뒤, 하나님께 호소하는 식으로 끝을 맺어왔습니다(6: 7-21; 10: 2-22; 13: 20-14: 22). 그런데 16-17장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은 조금 다릅니다. 친구들에 대하여 간간이 언급하는 가운데 독백으로 결론을 맺기 전(17: 11-16), 주로 하나님께 간략히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공모자가 되어서 자기의 고통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합니다. 2-3절을 보세요. "그런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다.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너희는 이런 헛된 소리를 끝도 없이 계속할 테냐?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말끝마다 나를 괴롭히느냐?" 욥이 죄를 지어서 이 고난을 당하니 빨리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라는 친구들의 말이 견딜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들은 개역 성경에서는 '번뇌케 하는 안위자들,' 개역 개정판에서는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 이런 말을 'oxymoron,' 즉 모순어법이라고 합니다. 서로 정반대 되는 단어를 결합시켜 삶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지적하는 언어형식이지요. 예컨대 '침묵의 소리,' '깨끗한 혼란,' '지독한 친절,' '창조적 파괴,' '똑똑한 바보,' 등등을 들 수 있습니다.


노 년의 뉴턴이 어느 날 난로 앞에 앉아있었는데 불이 너무 뜨거워 하인을 불러 벌겋게 단 석탄을 꺼내도록 했습니다. 이 때 하인 왈, "석탄을 꺼내는 대신 왜 의자를 난로에서 조금만 옮겨 떨어져 않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또 뉴턴은 크고 작은 고양이 두 마리를 길렀는데 서재에 들어오려고 서로 다투는 모양을 보고서는 자기 딴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냈습니다. 문짝에다가 큰 놈을 위해서는 큰 구멍을, 작은 놈을 위해서는 작은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상식으로 볼 때 큰 고양이가 큰 구멍으로만, 작은 고양이가 작은 구멍으로만 들어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 경우 뉴턴을 '우둔한 천재'라 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모순어법은 대립적인 사실이나 상반된 생각을 상호 모순되게 표현함으로서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언어표현법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한다고 갖가지 말을 쏟아 놓는데 실상은 다 재난만 안겨주는 말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입에 발린 말로 욥의 아픈 마음을 더욱 후벼팠던 것입니다!


이 런 맥락에서 16: 6절 말씀은 욥의 참담한 처지를 유감 없이 드러냅니다.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이 고통 줄어들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어 보아도 이 아픔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아, 얼마나 재치 있는 표현인지요!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 고함을 질러봐도 입을 꼭 다물고 깊은 침묵 속에 잠겨 들어가도 아픔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웃어봐도 울어봐도 소리쳐봐도 입을 꾹 다물어봐도 비수처럼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은 영영 사라지지 않습니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지요.


2. 하늘에 계신 증인(16: 7-17: 5)

  

이 부분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 사정없이 다루시는 원수라고 묘사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욥은 친구들이 이 처절한 고통에 대해 증언해주기를 바랍니다. 8-10절을 보세요. "주님께서 나를 체포하시고, 주님께서 내 적이 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모습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를 치신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지은 죄로 내가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분노하시고, 나를 미워하시며, 내게 이를 가시며, 내 원수가 되셔서, 살기 찬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시니, 사람들도 나를 경멸하는구나. 욕하며, 뺨을 치는구나. 모두 한패가 되어 내게 달려드는구나." 16: 12-14절을 보면 군사적인 용어까지 동원해가면서 하나님이 욥을 얼마나 가혹하게 공격하시는 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욥을 과녁 삼아 사방에서 화살을 날리시며 욥을 갈기갈기 찢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집중포화 한 가운데에서도 욥은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나는 폭행을 저지른 일이 없으며 내 기도는 언제나 진실하였다"(16: 17). 아무 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제 욥은 6: 18-22절에서 친구들이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부당한 고통을 하나님께 증언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상대로 무죄 소송을 벌일 때 친구들이 자기가 지금 아무 잘못한 것이 없이 견디기 어렵고 부조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양심껏 증언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친구들은 욥의 기대를 저버리고 거꾸로 욥이 지은 죄에 응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코너로 몹니다. 그리하여 욥은 땅이 이 억울한 고통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정의를 찾는 자신의 부르짖음이 허공에 산산조각 흩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절규합니다(16: 22).


20절에 보면 친구들이 자기를 조롱하니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욥의 억울한 고통에 귀기울이지 않으니 욥이 호소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9절과 21절을 보세요. "하늘에 내 증인이 계시고, 높은 곳에 내 변호인이 계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변호하듯이, 그가 하나님께 내 사정을 아뢴다." 여기서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당하게 핍박하시는 원수같은 하나님인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변호해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원수인 동시에 자신의 무죄함을 옹호해주시는 벗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읽을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증언하고 변호해주십니다. 욥도 지상에서 자기의 무죄를 입증해주고 결백을 변호해 줄 증인을 찾지만 조롱만 돌아올 뿐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 17: 3의 말씀처럼 욥은 자신의 보증이 되실 분은 주님 한 분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와 같이 결국 주님께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께서 친구들의 마음을 마비시키셔서 다시는 욥에게 우쭐대지 못하게 해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17: 5절에 흥미로운 격언이 하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옛 격언에도 이르기를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면, 자식이 눈이 먼다 하였다." 보증은 경제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손해 보지 않도록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들이 욥의 무고한 고난에 대해서 보증 서기를 꺼려하는 이유도 혹시 부주의하게 끼어 들었다가는 낭패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친구들이 마치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는 사람들처럼 손해 보지 않으려고 욥의 무죄함을 증언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보증 삼게 될 때 친구들의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처신, 즉 손해 보지 않기 위하여 욥의 보증이 되지 않으려는 행위는 그 댓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재난을 주는 위로자' 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 말은 욥이 친구들이 '돌팔이 의사들'(13: 4)과 마찬가지라고 힐난한 말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 말 저 말 내뱉다가 실제로는 더 큰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은 없는지요. 어설픈 지식과 쓸데없는 우월감으로 고통 당하는 이웃을 심문하고 정죄한 적은 없는지요. 그저 겸손히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따뜻하게 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것은 다시 지식과 실천, 이론과 경험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비슷한 경험을 당해본 사람만이 상대방의 아픔을 조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통의 실제적 경험이 아닌 인과율이라는 낡은 도그마,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말을 걸기 때문에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렇다면, 욥이 그토록 목말라 찾는 증인, 변호자는 어디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있는 그대로 대변해 줄 증인, 변호자는 또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이 바로 그 증인이요, 변호자이십니다. 예수님도 아무 죄도 없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했지만, 결국 그 하나님이 당신의 무죄성을 변호해주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욥과 같이 부조리한 고통을 직접 겪으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기에 우리가 억울한 일을 만나 하염없는 눈물을 뿌릴 때 홀로 임마누엘 되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되셔서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르트르는 지옥이 "서로 싫은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할 곳" 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있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의 시간과 공간을 천국으로 만들어 보시지 않으렵니까?


욥기 강해설교(15)  


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I): "내가 희망을 둘 곳은 어디에?" <욥 17: 6-16>


오 늘 본문은 비교적 짧습니다. 부흥회 이틀 간을 빼고 38일 동안의 분량으로 나누고 안배하다보니 어떤 날은 본문이 아주 길고 또 오늘 같은 날은 아주 짧습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여기에 욥기의 매우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인 욥의 죽음에 대한 바램이 나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죽음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욥 기는 아직 내세 신앙이 생겨나기 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모든 상황이 종결되는 끝으로 봅니다. 욥의 경우 현재의 고난이 극심하므로 자주 죽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욥이 절망스런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서 인식됩니다. 창조와 출생은 이미 이루어졌기에 자신이 손을 쓸 수가 없지만 죽음은 아직 한 가닥 희망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죽음은 욥이라는 존재 전체의 종말을 의미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재 당하는 부당한 고난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기 때문에 욥의 탄식에 여러 차례 되풀이되고 있습니다(3: 11-19; 6: 8-13; 7: 15-16; 10: 18-22; 14: 13-15; 17: 11-16). 여기에서 죽음에의 희망이 자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냥 탄식의 중요한 주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욥이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 스스로 목숨을 끝장내고자하는 자살 의도에서가 아니라 고난이 어서 속히 끝났으면 하는 염원의 표현으로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본문에서 욥이 죽음을 희망한다는 사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다시 절망스러운 상황으로(17: 6-10)

 

욥은 이제 냉정하게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니 만신창이가 된 모습입니다. 7-9절을 보세요. " 근심 때문에, 눈이 멀고 팔과 다리도 그림자처럼 야위어졌다. 정직하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며, 무죄하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불경스럽다고 규탄하는구나. 자칭 신분이 높다는 자들은, 더욱더 자기들이 옳다고 우기는구나." 이렇게 세 친구들로 대표되는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정직하고 무죄하다고 우기면서 정말 정직하고 무죄한 욥 자신을 불경하다고 몰아 부친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욥은 이런 사람들이 모두 와서 자기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단 한 사람의 지혜자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진짜 정직하고 무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자기라는 주장이지요. 그렇다면 욥에게 남은 희망은 무엇입니까?


2. 다시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른 스올(17: 11-16)


욥 에게 희망은 과거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또한 미래로부터 오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11절에 보면 욥의 날이 이미 지나갔고, 미래에 펼칠 욥의 계획, 마음의 소원도 다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포기하고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12절을 보세요. "내 친구들의 말이 밤이 대낮이 된다 하지만, 밝아온다 하지만, 내가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친구들은 고통의 밤이 지나가고 밝은 대낮이 찾아온다고 말하지만 욥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현실에 대한 상심이 컸으면 이렇게 까지 절망할까요?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고 말했는데 욥의 경우 확실히 옳습니다. 자,그렇다면 욥에게 희망의 빛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밝아오는 것일까요?


13-15절을 보세요. " 내 유일한 희망은, 죽은 자들의 세계[스올]로 가는 것이다. 거기 어둠 속에 잠자리를 펴고 눕는 것뿐이다. 나는 무덤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겠다. 내 주검을 파먹는 구더기를 '내 어머니, 내 누이들'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더 있는가?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욥은 스올, 즉 사자가 내려가는 지하세계를 한 가닥 희망으로 떠올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스올을 욥은 하나의 가정(home)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자리, 아버지, 어머니, 누이들, 이런 표현들이 가정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또한 여기 구덩이, 즉 무덤과 구더기는 이와 같은 가족 개념과 연합되어 죽은 사람을 절대 무(無)로 돌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욥이 죽어서 아버지로 표현된 무덤 구덩이의 자식이 된다는 것과, 욥의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들은 욥의 어머니 자매처럼 된다는 것은 욥이 죽어서 흙이나 구더기와 같이 절대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나 16절을 보면 이와 같은 한 가닥 희망마저도 욥이 죽어 스올로 내려가면 죽음과 함께 구덩이에 매장되어 구더기의 먹이감이 되고 맙니다. 희망은 산 자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죽은 자는 희망까지도 '해당 무'가 되기 때문이지요.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실레노스라는 사람은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요, 일단 태어났다면 되도록 빨리 죽는 것이 상책." 이 라고 말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고난 속에 처한 사람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절망감이지요. 욥에게서도 죽음에로의 바램은 현재의 부당한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서 인식됩니다. 그만큼 절망스러운 곤경으로부터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치는 하나의 해방구로서 죽음과 스올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욥은 결코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이 아닙니다. 다만 기가 막힌 고난의 상황에 대해서 탄식하다보니 하나의 도피처로서 죽음을 떠올리게 된 것이지요. 우리도 너무나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내 죽으면 이 고생 다 끝나지." 라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죽음은 불가해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탄식할 때 하나의 탈출구로서 흔히 그 기능을 하는 것을 잘 알지만 우리는 죽음에로의 바램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망 선고를 받은 임종 환자들은 극심한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자기가 죽을 리가 없다며 죽음의 현실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고립'의 단계를 시작으로 해서 '분노와 거부의 단계'로 넘어 갑니다. 그런 뒤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이제부터는 선하게 살고 싶으니 좀 더 살게 해달라고 신과 타협하는 '거래의 단계,'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 절망에 빠지게 될 때 '침울'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욥이 자신의 고통을 탄식하며 죽음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욥이 아직도 '분노와 거부의 단계' 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 싶습니다. 흥미롭게도 욥의 탄식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죽음이 오늘 봉독한 17: 11-16절을 끝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이것은 욥이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는 않는지요?       


이제 욥과 같이 처절한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첫째, "차라리 내 죽으면 이 고통 당하지 않지." 하면서 죽음이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쳐 고난에 찬 현실로부터 피해 가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욥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 듯이 보입니다. 둘째, "누구나 다 이런 고통 당하지 나라고 예외인가?" 하면서 포기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 고통의 의미를 물으면서 고통을 적극적으로 뛰어넘으려는 자세가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은 참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욥의 경우에도 친구들의 말도 들어보고 탄식하고 절규를 해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에 죽음에로까지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피해가든, 포기하든, 뛰어넘든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욥이 절망하듯이 죽음으로 고통이 끝난다는 발상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고 지나친 우려입니다. 그 전에 고통은 종결될 것입니다!


끝으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하나 가르쳐 드립니다. "죽음을 기억하자." 라 는 의미인데 아주 엄격하기로 소문난 시토 수도회에서 인사말 대신 쓰도록 한 말입니다. 중세 시대의 성화를 보면 토굴 속에서 해골을 앞에 두고 관상 기도에 빠진 수도사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유럽의 성당 가운데에는 제단 앞 지하에 망자의 해골과 뼈를 차곡차곡 쌓아두어 위에서 내려다보게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너의 죽음도 기억하라는 뜻이지요. 욥은 죽어서 들어가는 무덤이 잠자리를 펴고 눕는 것으로, 구덩이가 자기 아버지요, 자기 시신을 파먹는 구더기를 자기 어머니요 자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죽음에 친숙하다는 표시이지요.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닌 나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욥기 강해 22장 - 25장  (0) 2012.08.18
[펌]욥기 강해 18장 - 21장  (0) 2012.08.18
[펌]욥기 강해 9장 - 12장  (0) 2012.08.18
[펌]욥기 강해 4장 - 8장  (1) 2012.08.18
[펌] 욥기 강해 1장 - 3장  (0) 2012.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