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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펌]욥기 강해 9장 - 12장

욥기 강해설교(7)  


빌닷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너무 멀구나!" <욥 9: 1-35>


9-10 장은 빌닷의 첫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인데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신학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난해한 신학적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제 9-10장에서 욥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매우 어려운 주제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1. 인간의 힘으로 판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9: 2-31)


욥 8: 3에서 빌닷은 '하나님의 공의'를 무기로 해서 욥을 공박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빌닷에게 있어서 '하나님 = 정의의 집행자'라는 도식은 너무나 선명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엘리바스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 4: 17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죄있고 깨끗지 못한 까닭에 고난을 당한다는 확신하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힘써 강조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바로 이와 같은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서 욥은 반론을 제기합니다.


2절을 보세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인간이 아무리 의롭고 정직하고 순전하다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다는 주장과도 연결됩니다. 바울은 롬 3: 10-18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은 모조리 죄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간의 행위나 공로와 상관없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의로워진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편에서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엘리바스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주장할 수 없는 이유를 전적으로 인간의 연약함 탓으로 돌렸습니다. 사람은 지혜도 부족하고(4: 21), 연약하고(4: 19-20), 오류와 죄가 있기 때문에(5: 6-7) 의롭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주장할 수 없는 이유를 사람 쪽에서 찾는 엘리바스와 달리 욥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지혜가 도무지 인간의 힘과 지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한하고 막강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은 아예 비교가 되지 않고,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주장하는 것은 아예 싹수가 없는 일이라는 절망이지요.


그 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 하나 제기됩니다. 정의의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 즉 욥이 과연 자기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이 고통을 당하는지 아니면 아무 잘못 없이 무고하게 이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와 같은 공통 기반을 설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지혜는 인간의 힘과 지혜와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자기의를 주장하거나 무죄성을 변호할 길이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탄식이지요.


자, 이런 맥락에서 3-4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과 논쟁을 한다고 해도, 그 분의 천 마디 말씀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니, 그를 거역하고 온전할 사람이 있겠느냐?" 또한 11-14절 말씀도 보세요. "하나님이 내 곁을 지나가신다 해도 볼 수 없으며, 내 앞에서 걸으신다 해도 알 수 없다. 그가 가져가신다면 누가 도로 찾을 수 있으며, 누가 감히 그에게 왜 그러시냐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진노를 풀지 아니하시면 라합(혼돈과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바다괴물)을 돕는 무리도 무릎을 꿇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분에게 한 마디라도 대답할 수 있겠으며, 내가 무슨 말로 말대꾸를 할 수 있겠느냐?"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너무 멀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를 주장하기에는 도저히 역부족이라는 탄식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기 때문에 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비는 수밖에 없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비록 내가 옳다 해도 감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다만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심판하실 그 분께 은총을 비는 것뿐이다." 여기 보세요. 바로 여기에 욥의 갑갑함, 하릴없는 절망이 묻어 있습니다. 분명 욥은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옳아도 하나님의 정의는 도무지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편에서 변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9절 말씀을 보면 자기의와 무죄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 문제를 재판에 부치고 싶어도 하나님을 재판정으로 불러 올 방법이 막연하다는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마침내 절망에 빠집니다. 20-22절 말씀을 보세요. 비록 욥이 옳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정죄하실 것이며, 흠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틀렸다고 말하실 것이며, 결국 하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한가지로 심판하시는 불공평한 분이라는 비관적 결론에 도달하고 맙니다.


욥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찾을 수 없음', '헤아릴 수 없음'에 깊은 곤혹과 좌절감을 느낍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서 사람의 힘과 지혜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이제 이와 같이 인간이 자기의와 무죄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해도 양자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 기반도 가지지 못했다는 절망감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끕니다.


2. 불가능한 재판에 대한 탄식(9: 32-35)

 

사 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법정으로 가면 됩니다. 고소해서 법적인 심판을 받으면 됩니다. 욥의 경우, 자기 자신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하게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친구들은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라는 결과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딜레마에 빠진 욥이 만일 하나님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람이라면 함께 법정에 가서 재판관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으면 해결이 됩니다. 그 때 욥이 피고가 되고 하나님이 원고가 되어서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을 거쳐, 여러 증인들의 증언을 청취해서 과연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댓가로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 잘못 없이 무고한 형벌을 당하고 있는지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쌍방간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된 기준이 있고 공정한 절차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너무 멀어 자기나 하나님이 법정에 가서 공방을 펼칠 길이 없다는 탄식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기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폭력에 의해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하고 억울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32-33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을 할 수 있으련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욥은 자기의 정의 이해는 인간적인 이해이고 하나님의 정의 이해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이 고통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저 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단순히 양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편에서 그 어떤 유비(類比 analogic)를 통하여 하나님을 설명해도 그것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욥도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간격, 즉 질적 차이 때문에 고뇌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금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처절한 고난을 당한다면 이유라도 알아야 할 터인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기관단총에 집중 포화를 맞고 있는 형국이지요. 하나님이 사람이라면 욥이 왜 이 고난을 당하는지 설명해줄 수 있을 터인데, 또 서로간에 입장차이가 있으면 법정에 가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판단해줄 수 있는 재판관의 판결을 받으면 끝날 터인데 그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경건과 선행의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불의와 악행의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전통 견해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죄 없는 자기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가해자일 뿐이라며 절규하고 있습니다.


오 늘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생길 때마다 양쪽의 입장을 다리 놓아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중재자를 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긴장과 간격을 메우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100 % 참 하나님이시며, 100% 참 인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추어져 숨어 계신, 그리하여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고 접근하기도 어려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욥이 예수 그리스도 오신 후에 이와 같은 고난을 당했더라면 그의 물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입니다. 욥에게는 중재자가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참 의로운 중재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욥기 강해설교(8)  


빌닷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I):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 <욥 10: 1-22>


본 문 말씀은 빌닷의 첫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두 번째 대꾸입니다. 여기서 욥은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절규합니다. 첫째로,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왜 당신이 손수 창조하신 자기를 괴롭히시는지 항의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창조의 목적과 의미를 묻는 것이지요. 욥은 현재 당하는 고난이 너무나 부당하고 극심해서 자기 존재의 기원, 즉 자기가 태어난 날과 잉태된 날 밤이 차라리 사라졌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너무나 힘든 일을 당할 때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하고 탄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욥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당연히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본래 자기를 만드실 때에는 좋은 의도로 그리하셨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까닭을 알 수 없는 무고한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과 의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 째로, 욥은 또 한번 죽음을 희구하며 차라리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 달라고 간구합니다. 적어도 욥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욥을 원수로 대하셔서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계시기에 하나님이 자기 곁을 떠나시지 않고서는 쉴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창조와 죽음에 대한 질문은 존재의 출발점과 종점에 대한 질문이며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흔히 집착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두 물음은 역설적으로 욥이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자기의 삶 속에 끊임없이 간섭하시는 주님이심을 철두철미하게 믿기에 이렇게 청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1. 선하게 창조할 때는 언제고 지금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10: 1-17)


우리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할 때 우리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원망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어버이 왜 나를 낳으셔서 이 고생하게 하셨지?" 욥 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면 끝까지 보호해주셔야 마땅하지 창조 때와 달리 이 고통을 주시는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욥은 선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과거행위와 부당한 고통을 안겨주시는 하나님의 현재행위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우 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다스리시고 보호하시고 완성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하나 둘 만드신 후 연거푸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하나님 창조의 선성(善性)을 확신합니다. 이제 욥은 창조의 선성을 기초로 해서 창조 때와 현재 자신의 모습 사이의 너무나 달라진 간격에 대해서 괴로움을 쏟아냅니다. 생명의 수여자로서의 창조주께서 지금은 자기의 삶을 위협하는 생명의 파괴자로서 행동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3절 말씀을 보세요.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됩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교한 작품을 만드는 장인(匠人)이라는 개념을 만나게 됩니다. 렘 18장은 하나님을 진흙으로 그릇을 빚는 토기장이로 비유했습니다. 욥 역시 하나님이 자기를 만드셨을 때 정성을 다하여 아주 선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신 장인이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10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에 하나가 욥을 빚을 때 정성을 다한 주님의 손입니다(3b, 7b, 8a). 그런데 이렇게 선한 목적을 가지고 온갖 정성을 다해 자기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지금 욥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십니까? 8-9절 말씀을 보세요. " 주님께서 손수 나를 빚으시고 지으셨는데, 어찌하여 이제 와서, 나에게 등을 돌리시고,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진흙을 빚듯이 몸소 이 몸을 지으셨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티끌로 되돌아가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으실 때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계속해서 11-12절 말씀을 보세요. "주님께서 살과 가죽으로 나를 입히시며, 뼈와 근육을 엮어서, 내 몸을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나를 돌보셔서, 내 숨결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주 님은 욥을 정성껏 빚어 만드신 장인, 즉 창조주일 뿐 아니라 지키고 보호해주시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지금 욥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말입니까? 13-17절 말씀을 보면 예전의 선하디 선한 창조주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욥을 해치실 생각을 품고, 그 어떤 죄도 용서치 않으시며, 사나운 사자처럼 욥을 덮치시고 상처를 주시며 욥을 공격할 계획까지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욥이 탄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으실 때의 장인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이 선한 목적을 가지고 그토록 정성을 다해 만든, 위대한 작품인 자기를 시방은 해치고 계시냐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요 섭리라면 왜 굳이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느냐고 항의합니다. 선한 목적으로 정성을 다해 진흙으로 좋은 그릇을 빚으셨다면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지 다시 깨부수어서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는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탄식이지요.


2. 제발 나를 홀로 있게 해주세요!(10: 18-22)


이제 자기를 지으신 장인으로서의 하나님이 당신의 작품을 내치시는 모순을 탄식하며 욥은 3장에서 이미 피력했던 죽음으로의 퇴행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18-19절 말씀을 보세요.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할 것이라면 왜 나를 모태에서 살아 나오게 하셨습니까? 차라리 모태에서 죽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나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겠습니까? 생기지도 않은 사람처럼, 모태에서 곧바로 무덤으로 내려갔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장인이 온갖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에 어떤 위해를 가하면서 내친다면 왜 힘써 그 작품을 만들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항변이지요. 차라리 모태에서 죽어버려 곧바로 무덤으로 갔더라면 이 꼴을 보지 않고 얼마나 좋았겠느냐며 한탄합니다.


이제 이와 같은 죽음으로의 퇴행 의식은 욥으로 하여금 제발 자기를 혼자 내버려두라는 청원으로까지 이어집니다. 20절을 보세요. "내가 살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를 좀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게 남은 이 기간만이라도, 내가 잠시라도 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욥 은 자기를 극한 고난으로 내몰고 있는 하나님이 계시는 한 자기에게 안식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21-22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곁을 떠나가심으로서 스올, 즉 다시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기 전에 잠시 안식을 누리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욥의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 하나님이 정성을 다해 빚은 선한 피조물을 왜 끝까지 잘 돌보지 못하시고 내 치시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와 관계된 문제입니다. 렘 18: 1-6은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유를 강조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잘못 빚을 경우 그 그릇을 깨뜨리고 다른 그릇을 빚을 주권과 자유가 있듯이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마음에 어긋날 경우 깨뜨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견디기 어려운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토로합니다. 왜 그렇게 선한 목적으로 정성을 다해 손수 빚으셨다면 끝까지 자기를 선대하여 아름다운 모양으로 간수하셔야지 되려 원수가 되어서 자기를 이토록 괴롭히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항의와 절규는 욥이 의미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그 의미를 파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던질 수 있는 일시적 질문이며 아직 욥의 최종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우리가 욥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두 가지로 응답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 째로, 예레미야가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은 진흙으로 작품을 빚을 수도 있고 깨부실수도 있는 절대 주권과 자유를 가진 분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욥을 지금과 같이 험하고 아프게 다루는 것도 욥을 지으신 작가로서의 하나님 마음이라고 풀이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 경우 욥이 험하고 아프게 취급받아야 할 아무런 신앙적 윤리적 이유 없이 부당하게 그렇게 된다면 욥을 지으신 작가, 장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윤리성이 심각하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인 경우 어떤 조각가가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지극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자기 맘에 들지 않을 경우 발로 차고 깨뜨리고 해서 완전히 파괴시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처럼 순전히 작가의 자유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조각가와 작품의 경우와 달리 하나님과 인간의 경우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에 납득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을 괴롭힌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둘 째로, 고난에 대한 교육 훈련용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정금과 같이 연단시켜서 더욱 훌륭한 신앙인으로 만드시기 위함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욥의 경우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높습니다. 다시 말해 장인으로서의 하나님은 지금 당신이 손수 만드신 작품으로서의 욥에게 여러 가지 위해를 허락하고 계시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부분적일 뿐 욥의 신앙 인격이 합격점에 이르렀다고 판단될 경우에 모든 고통은 끝이 나고 욥은 그 옛날 이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해석이 욥기가 취할 자연스러운 결론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Divine Pedagogy,' 즉 하나님의 교육 훈련용으로 보기에 도저히 정도가 지나친 악과 고난의 경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도 엇비슷하지만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 나치 정권에 의해 멸절당한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의 경우 하나님의 교육 훈련으로서 해석하기에 지나치게 가혹하고 비대칭적인 악과 고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제 3의 대답이 있을지 우리는 계속해서 욥기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욥기 강해설교(9)  


소발의 첫 번째 공박: "들나귀 새끼같이 미련한 이여"  <욥 11: 1-20>


본문 말씀은 셋째 친구인 소발이 욥을 공박한 말입니다. 세 친구가 욥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 각자의 성품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누가 네게 말을 걸면 너는 짜증스럽겠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다"(4: 2). 엘리바스가 시작한 말입니다. "언제까지 네가 그런 투로 말을 계속할 테냐?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센 바람과도 같아서 걷잡을 수 없구나"(8: 2). 빌닷의 말이지요. 그 다음에 본문 2-3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어느 누가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네가 혼자서 큰소리로 떠든다고 해서, 우리가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우리를 비웃는데도, 너를 책망할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소발이 한말입니다. 그 강도를 놓고 볼 때 소발이 한 말이 가장 과격합니다. 따라서 엘리바스가 비교적 점잖은 사람처럼 보이고, 빌닷은 조금은 더 정죄하는 스타일의 사람처럼 보이고, 소발의 감정이 가장 격하고 오만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왜 냐하면 욥이 하는 말을 쭉 듣고 있다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소발이 던진 발언의 요점은 인간의 제한된 지혜로서는 감추어져 있고 무한한 하나님 지혜의 신비를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쓸데없는 변론을 즉각 중단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대(對) 제한된 욥의 지혜(11: 2-12)


소 발이 욥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참을 수 없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바로 욥 스스로가 죄 없다는 결백성의 주장이었습니다. 소발이 볼 때 어리석은 인간이 짧은 지혜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와 무죄성을 주장하는 것이 주제 넘는 일입니다. 4-6절을 보세요. "너는 네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주님 보시기에, 네가 흠이 없다고 우기지만, 이제 하나님이 입을 여셔서 네게 말씀하시고, 지혜의 비밀을 네게 드러내어 주시기를 바란다. 지혜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 보세요. 소발은 먼저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 욥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흠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가당치 않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아둔한 머리로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렵다. 셋째, 하나님께서 욥이 지은 죄에 응당 받아야 할 벌보다 가벼운 벌을 내리신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말이 될 것입니다. 욥이 아주 짧은 지혜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숨겨진 무궁무진한 지혜의 빛에서 볼 때 어이없는 짓이며, 하나님의 지혜로 조명해 볼 때에도 욥은 오히려 당연히 받아야 할 벌보다 가벼운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친구치고는 아주 과격하고 직설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 이런 관점에서 7-12절 말씀을 보세요. 소발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의 4차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보다 높고(높이), 스올보다 깊고(깊이), 땅 끝까지의 길이보다 길고(길이), 바다보다 넓다(넓이)는 것입니다(8-9절). 이 말씀은 엡 3: 18절에서 언급한 그리스도 사랑의 4차원성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지혜도 그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소발이 이와 같이 무제약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욥의 어리석은 지혜와 비교하기 위함이지요. 바로 앞장에서 욥은 빌닷에게 대꾸하면서 하나님 창조의 선한 목적과 의미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소발이 보기에 욥의 어줍잖은 지혜로 하나님 창조의 신비, 운운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7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아낼 수 있느냐?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다 측량할 수 있느냐?" 무한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지혜 앞에 감히 욥이 명함도 내밀 수 없다는 일갈(一喝=한 번 큰 소리로 꾸짖음)이지요. 이제 하나님의 지혜 앞에 선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는 물음 앞에서의 무지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 앞에서의 무능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1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잘못하는지를 분명히 아시고, 악을 보시면 곧바로 분간하신다." 욥이 자신의 죄에 관해서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혜와 분별력이 넘치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소발이 보기에 욥은 미련하기 때문에 자기 결백을 주장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사실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세요. "미련한 사람이 똑똑해지기를 바라느니 차라리 들나귀가 사람 낳기를 기다려라." 소발은 욥을 미련한 사람, 원어대로 하면 골이 '텅빈 사람'인데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지혜롭기 되기는 아예 들나귀가 사람을 낳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해버립니다. 욥은 선천적으로 골이 빈 사람이기에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소발의 단정은 얼마나 가혹한 말인지요? 


2. 회개냐? 고집이냐?(11: 13-20)


이 렇게 무섭게 욥을 몰아 부치던 소발이 이제 욥에게 미래의 회복 가능성에 대해서 권고합니다. 엘리바스나 빌닷이나 소발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셋 다 욥을 심문하고 정죄한 뒤 반드시 미래에 대한 해결책도 함께 제시한다는 사실입니다(5: 8 이하; 8: 5-7 참조). "병주고 약준다."는 속담 그대로이지요. 무엇보다도 소발이 제시한 해결책은 빌닷이 준 충고, 이른바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말씀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그러면 욥이 어떻게 해야지만 회복될 수 있습니까?


13-14절 말씀을 보세요. "네가 마음을 바르게 먹고 네 팔을 그분 쪽으로 들고 기도하며, 악에서 손을 떼고, 네 집안에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하면." 여기 보세요. 욥이 지금 당하는 고난의 삶을 청산하고 서광이 비치는 미래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자세와 행실을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을 바로 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그런 다음에 죄악에서 떠나 불의를 청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어떤 축복이 기다립니까? 15-19절 말씀을 보세요. 부끄럼 없이 얼굴을 들 수 있으며 편안해져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괴로운 일을 다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 같이 환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며 희망에 가득차 아무 걱정거리가 없이 자리에 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욥이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기만 하면 소망과 안식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만일 욥이 고집을 부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20절을 보세요. "그러나 악한 사람은 눈이 멀어서, 도망 칠 길마저 찾지 못할 것이다. 그의 희망이라고는 다만 마지막 숨을 잘 거두는 일뿐일 것이다." 만일 욥이 악인의 길을 계속 고집할 경우 눈이 어두워 도망칠 길 마저 찾지 못하고 쓸쓸히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우 리가 욥기를 읽을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편입니다. 언뜻 보아서는 세 친구들이 훨씬 더 신앙적으로 보이고 옳은 말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욥은 불신앙적이고 지나치게 도전적이고 불순종적인 것처럼 비칩니다. 이러한 피상적인 느낌은 욥이 세 친구들과 더불어 세 바퀴 논쟁을 벌이는 내내 계속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하나님께서 친구들이 아닌 욥의 손을 들어주십니다(42: 7 참조). 다시 말해 옳다 인정받은 사람은 욥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 비록 옳은 논리를 가졌더라도 선생인 냥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닌 욥과 같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반항적이고 전투적인 탄식까지도 다 받아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우 리는 친구들에게서 교사적인 냄새, 율법주의적 취향을 강하게 느낍니다. 이들이 던지는 말은 오랫동안 전수되어 내려온 지혜의 보고에서 나온 말이기에 거의 다 옳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점은 친구가 얼마나 큰 아픔을 겪고 있는가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은 인과율로 욥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풀어보려 했지만 욥은 자신의 고난이 그와 같은 고전적인 이론만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에서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이것은 신앙 없는 교만과 불순종의 소치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로 대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적어도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자녀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격 존재로 여기신 세리와 창기들을 그냥 율법적인 전통을 따라 죄인들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옳았지만 그들의 시각과 삶이 하나님을 닮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게는 욥과 같은 실존적인 고통의 경험 없이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으로 해석하고 정죄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고만 합니다. 여기에 친구들과 욥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습니다.


소 발의 말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다 한들 어떻게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욥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이의를 제기한다한들 어찌 하나님의 숨겨진, 신비한 지혜까지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 12장에서 드러나겠지만 소발이 지적하는 것처럼 욥이 자기 지혜의 연약함을 모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욥의 탄식과 저항은 견딜 수 없이 깊은 고난의 심연에서 분출되어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입니다. 그의 탄식은 어떤 지식이나 교리나 객관적 관찰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처절한 고난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자연스레 쏟아져 나온 인간의 반응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담학에 있어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자기의 고통을 다 털어놓고 하소연만 할 수 있어도 웬만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욥도 더욱 더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 인격으로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이와 같은 탄식과 항의와 절규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결국 소발의 공박을 읽으면서 어설픈 논리로 고난당하는 이웃의 아픔을 해석하고 정죄하는 것보다 진지한 공감과 정직한 침묵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닫습니다.


욥기 강해설교(10)  


소발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 "너희가 지혜를 전세라도 냈느냐?" <욥 12: 1-25>


소 발의 시건방지고 격정적인 발언에 대해 욥은 응답을 시도합니다. 욥이 보기에 세 명의 친구들이 도덕적 인과율의 논리로 심문하고 정죄하는 데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발 한 사람만이 아닌 세 사람 모두를 상대합니다. 12-14장은 소발의 공박이 끝난 뒤 욥이 한 대답입니다. 지금까지 욥이 해 온 대답치고 가장 긴 분량입니다. 이것은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 세 친구들의 발언이 다 끝남으로 첫 번째 사이클의 논쟁이 종결됨으로서 결론을 내리고자 했기 때문에 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4장에서 엘리바스의 말로 시작된 친구들과의 논쟁이 11장에서 소발의 공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전개되어 왔는데, 이 첫 바퀴 대화에 대한 결론을 피력하다보니 다소 장황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본 문 말씀은 주로 지혜 문제, 즉 친구들과 욥의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욥은 먼저 친구들이 지혜로운 척 하는 것에 대해 통박하면서 자기도 그들 못잖은 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응수합니다. 그 다음에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자연 일반의 지혜를 언급합니다. 그런 뒤 욥은 그 엄청난 하나님의 지혜가 때때로 이 역사 안에서는 안정과 유지가 아닌 불안정과 파괴로 나타나는 모순과 역설, 부조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1. 지혜의 독점자로 자처하는 친구들에 대한 반박(12: 2-6)

  

소 발은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찬양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욥의 미련함까지 물고 늘어졌습니다. 이것은 은근히 자기가 욥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언동이었습니다. 아주 시건방지고 학자연(學者然)체 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지요. 그런데 욥이 보기에는 소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 명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에게 지혜를 한 수 가르치려 드는 선생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들이 마치 지혜를 전세라도 낸 양 으스대는 소발을 비롯한 친구들을 향하여 욥이 포문을 엽니다. 2-3절 말씀을 보세요. "지혜로운 사람이라곤 너희밖에 없는 것 같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너희와 함께 사라질 것 같구나. 그러나 나도 너희만큼은 알고 있다. 내가 너희보다 못할 것이 없다. 너희가 한 말을 모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욥도 지혜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친구들만 지혜의 달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어 욥은 4절에서 자기도 한 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동방의 의인으로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큰 지혜의 사람이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친구들에게 조롱이나 받는 처지로 전락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자, 그러면서 욥은 5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너희가 불행한 내 처지를 비웃고 있다. 너희는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민다." 이 말은 욥과 친구들의 처지와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친구들은 욥과 같이 극심한 고통을 당해 보지 않았기에 욥의 형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공감과 위로보다는 심문과 정죄로 일관하면서 욥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욥과 처지가 다른 친구들은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 밀 듯이,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 밀어 넣듯이 욥을 더욱 더 큰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여 러분, 처지와 입장의 차이, 고난을 이해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포인트인지 모릅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유학 가서 가장 힘든 일이 언어 문제였습니다. 듣기는 대충하겠는데 말하기와 쓰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교수님들 가운데 학업이나 다른 이유 때문에 외국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저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항상 격려부터 먼저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입장에 처해보지 않은 분들은 외국 학생이 언어 장벽을 딛고 공부를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이해를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국내 학생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대했습니다. 그 때 저는 입장의 차이가 이다지도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함)라는 말이 있지요.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해본다는 말입니다. 빛나는 논리와 기막힌 지혜로 무장된 친구들의 말이 욥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바로 양자간의 입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처지를 얼마나 이해하는가?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의 처지를 얼마나 고려하는가? 성공자는 실패자의 처지를 얼마나 헤아리는가? 사용주는 노동자의 권익을 얼마나 앞세우는가? 이런 물음들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화목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하여 매우 중요합니다. 친구들은 욥과 같이 가슴을 후비는 무고한 고통을 당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욥의 입장을 이해할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욥이 지금 고통 당한다는 현실만 주목하여 욥을 죄인으로 몰아 부칠 뿐입니다. 서로 다른 위치를 극복하지 못하기에 고통 없는 자들이 고통 당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실패자로 정죄할뿐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입장의 차이가 가져온 폭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6절 말씀도 중요합니다. 친구들이 그토록 강조한 도덕적 인과율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탄식이 아닙니까? "강도들은 제 집에서 안일하게 지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도 평안히 산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까지 자기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 세 친구들의 논리대로 한다면 강도는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제 집에서 평안하게 지냅니다. 이 사회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뇌물로 수억씩을 꿀꺽 꿀꺽 삼키면서도 존경받고 평온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부인하고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 형통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욥은 지금 세 친구가 그토록 강조한 도덕적 인과율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해서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전하게 살아도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많다는 냉소이기도 합니다.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삼라만상의 지혜(12: 7-12)


소 발은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의 4차원성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늘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고, 땅 끝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다는 것이지요. 이제 욥은 이러한 소발의 말을 맞받아 칩니다. 이러한 지혜, 즉 10절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일체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혜는 자연 세계의 4대 영역에 있어서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7-10절을 보면 땅의 짐승들, 공중의 새들, 땅(지하), 바다의 물고기들도 다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일체의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연만물도 다 알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짐승들과 새들과 땅과 물고기들도 다 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혜가 현실에 있어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현재의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고 유지하시는 모습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부조리한 현실이 문제입니다.  

           

3. 역설과 모순, 부조리로 가득찬 세계 현실(12: 13-25)


욥 은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것은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풀들과 물고기들조차도 알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13-16절 말씀에 있습니다. " 그러나 지혜와 권능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며, 슬기와 이해력도 그분의 것이다. 하나님이 헐어 버리시면 세울 자가 없고, 그분이 사람을 가두시면 풀어 줄 자가 없다. 하나님이 물길을 막으시면 땅이 곧 마르고, 물길을 터놓으시면 땅을 송두리째 삼킬 것이다. 능력과 지혜가 그분의 것이니, 속는 자와 속이는 자도 다 그분의 통치 아래에 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최고의 지혜와 권능을 가지신 분으로서 일체의 생사화복이 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삼라만상도 다 알고 인정합니다.


그 러나 이제 문제는 17-25절까지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와 역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과는 정반대로 작동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인과율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무질서와 파괴로 치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고관들을 벗은 몸으로 끌려가게 하시며 재판관들을 바보로 만들기도 하십니다. 왕들이 결박하는 줄을 푸시고 거꾸로 왕들을 포박하십니다…등등. 그런데 여기 17-25절까지 욥이 예로 든 모든 경우는 거의 다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세우시는 예는 거의 들지 않고 모조리 죽이시고 무너뜨리시는 부정적인 경우만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친구들이 일사불란하게 주장했던 도덕적 인과율이 이 세계 속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척척 들어맞는다는 통상적인 지혜를 반박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저지른 악인들만 거기에 대한 응벌로서 고난을 주신다고 본 반면에 욥은 죄없는 사람들도 무너뜨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구들에게 있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악인들이어야 하는데 반하여, 욥이 예로 든 경우에는 악인이요 죄인이라는 이유와 설명이 일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그저 하릴없이 하나님의 권능의 손아래 무너지고 쓰러질 뿐입니다. 죄없는 의인도 쓰러질 수 있다는 강한 암시이지요! 여기에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신비가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지혜가 너무나 엉뚱한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진행되는 역사의 부조리한 현실을 정직하게 고발합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 입장의 차이,' 이것이 오늘 말씀의 화두가 아닌가 싶습니다. 친구들과 욥 사이에는 입장의 차이가 너무나 극명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무고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욥과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당한다고 본 친구들은 각기 처한 형편이 달랐습니다. 그들이 만일 욥이 당하는 부당한 고난을 지금 함께 당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적어도 과거에 비슷한 경험이라도 한 적이 있었다면 욥을 그런 태도로 공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 없이 여유로운 자요 평온한 자이기에 과거의 빛나는 지혜 전승으로 무장한 제 3자,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으로서 다가 올뿐입니다. 그리하여 역지사지가 안 되기 때문에 서로가 대화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어긋나게 됩니다. 욥이 하나님의 우주 통치에 대한 통상적인 지혜에 거슬려 여러 가지 무질서하고 파괴적인 사례만 골라서 든 것도 입장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고통과 무관한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인과율에 따라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질서와 정의가 잘 잡힌 곳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권선징악(勸善懲惡=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과 같이 부당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깨지고 쓰러지는 사람들만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 걸맞지 않는 역설과 모순과 부조리만 부각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올바른 의사소통을 하고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입장의 차이를 메워나가야 합니다. "내가 만일 저 사람의 처지에 놓인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며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정중하게 헤아린다면 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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