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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펌]욥기 강해 4장 - 8장

욥기 강해설교(4)  


엘리바스의 첫 번째 공박: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욥 4: 1-5: 27>


욥 기의 본론은 3장부터 시작됩니다. 욥이 하나님께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독백으로부터 시작하여 연이어 욥의 세 친구들과의 논쟁이 나옵니다. 특히 욥기의 몸통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4장부터 42: 6절까지는 욥과 세 친구들이 벌이는 설전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욥과 친구들이 나눈 논쟁은 욥기 전체, 즉 42장 가운데 35개의 장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장수로만 따져서도 83%에 해당되는 분량입니다. 이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언제나 철학자요 신학자, 즉 지혜의 교사로서 자처하며 그렇게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로 위로자의 역할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들이 전수 받은 전통적인 지혜와 인생 경험 등을 통해 욥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교사로 둔갑하게 됩니다.


이 제 앞으로 여러분들이 욥이 세 친구들, 즉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읽게 될 때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들이 욥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모범적인 신앙인처럼 보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탄식하는 욥을 설득해서 혹시라도 하나님 앞에 몰래 범한 죄가 있으면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려고 갖은 이론을 구사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이 예로부터 전수받은 지혜 전통에 충실합니다. 그 지혜 전통이라는 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인간이 현재 당하는 고통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지은 죄악의 결과라는 입장입니다. 그리하여 욥이 이와 같이 참담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절대로 까닭 없이 생긴 일이 아니고, 다 욥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언제나 욥을 심문하고 정죄하는 선생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신학적인 해석이나 윤리적인 정죄가 아니라 참된 위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욥과 세 친구들이 벌이는 설전은 '실존적인 고난의 현실' 대(對) '고난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욥과 세 친구들이 나눈 설전을 통하여 중요한 진리 하나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약 3: 1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가르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혹한 고통을 겪는 친구를 그냥 찾아와 위로만 해주면 되는데 자기의 지혜와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그 고통을 해석하고 정죄하려고 합니다. "염장을 지른다, 허파를 뒤집는다."는 말도 있듯이 이와 같이 선생의 입장이 되어 해석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장작불에 기름을 붓듯이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경미한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는 혹 이해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피 흘리는 개구리에게 다시 돌멩이를 던지는 행위와 마찬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친구가 있을 때 가장 좋은 위로법은 함께 있어주는 것이며 정직한 침묵으로 슬픔에 동참하는 것뿐입니다. 어설픈 논리로 더 큰 슬픔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 늘 말씀은 세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엘리바스가 욥에게 던진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과 더불어 세 차례씩이나 뜨거운 설전을 벌이게 됩니다. 엘리바스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세 친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요 지도자급에 있었던 사람 같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엘리바스가 욥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인과응보의 도덕적 질서를 가지고 욥의 고난을 해석하다(4: 1-11)


먼 저 4: 1-11절 말씀을 보면, 엘리바스는 인과율을 가지고 욥의 고난을 해석합니다. 모든 결과는 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인데 욥이 이와 같이 고난받는 것도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고 고난받을 만한 원인이 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6-8절 말씀을 보세요.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네 믿음이고,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 네 희망이 아니냐?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여 기 보세요. 엘리바스가 욥의 고난을 해석하는 첫 번째 입장은 고전적인 지혜 그대로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추수의 법칙이지요.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예,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예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진리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반드시 그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 세계는 물론이고 인간의 도덕 생활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뿌리는가에 따라서 그 열매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100% 필연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선을 뿌렸는데 악의 열매를 거둘 수도 있고, 신앙과 경건의 씨앗을 뿌렸는데 고난과 재앙의 열매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지요.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서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반듯한 사람이었지만 순전히 사탄의 시기와 참소로 어이없는 재앙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내건 인과응보의 법칙, 혹은 추수의 법칙을 욥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 렇습니다. 고난에는 자기의 잘못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고난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신비한 고난도 있습니다.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날 때 거의 대부분은 무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백주 대낮에 죽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내걸 때 왜 하필이면 그들이 지목되었는가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는 누구든지 다 그런 고난을 당해야지 그 사람들만 선택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죄의 결과로 고난을 당한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모든 사람의 경우에 적용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경우 엘리바스의 논리는 욥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욥을 더욱 큰 실의로 내모는 비수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2. 자신의 영적 경험에 입각해 욥을 정죄하다(4: 12-5: 7)


4: 12-5: 7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엘리바스는 자신의 신비한 체험을 언급합니다. 한번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온 몸의 뼈마디가 흔들렸으며 온 몸의 털이 주뼛주뼛 섰는데 이런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17-21절 말씀을 보세요. 그 때 들은 음성은 분명히 엘리바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처럼 보이는데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없다." 는 메시지였습니다. 여기서 엘리바스는 욥이 의롭다고 변론하는 것에 대해서 아예 쐐기를 박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롭지 감히 네가 어떻게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이 같은 발언에는 두 가지 중대한 교만이 숨겨져 있습니다.


첫 째로, 엘리바스는 이 메시지를 신비한 영적 체험을 통하여 들은 말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믿음이 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음성을 들을 수 있기에 엘리바스의 체험이 가짜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받은 신비 체험을 덕을 세우고 이웃을 격려하는데 써야지 이웃의 꼭대기 위에 서서 심판하고 정죄하는 데 쓴다면 그것은 그 출처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엘리바스가 들었다는 신비한 음성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비 체험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세울 수 있는 것인지 그 열매를 주의해서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도 우리에게 가지가지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 째로,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수 없고, 사람이 창조주보다 더 깨끗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지만 욥의 경우에는 적절치 않은 말입니다. 물론 욥도 피조물이기에 창조주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으며 죄인에 불과하겠지만 욥의 태생적인 연약함, 본래적 죄성 때문에 이와 같은 불행이 찾아온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죄와 자범죄가 있듯이 원죄는 모든 인류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죄악이며 자범죄는 개개인이 특수하게 저지른 죄악의 결과입니다.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롭지 못하다는 인류의 보편적 죄악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욥이 개별적으로 저지른 자범죄의 결과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단지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롭지 못하다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욥이 고난을 겪고 있다면 엘리바스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욥과 동일한 고난을 당해야 옳습니다. 결국 엘리바스는 욥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 서서 어떤 일반 원리를 가지고 욥의 고난을 해석하려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3. 도덕률을 따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교수법'(divine pedagogy)(5: 8-27)


이 제 5: 8-27절 말씀을 보면, 엘리바스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도덕률이 한 치도 오차가 없다는 사실을 되뇌며 인간이 고난받는 것은 다 자기 잘못 때문에 생기는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쪽으로 몰고 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착한 사람은 반드시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징벌하시는 상벌관계에 철저하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17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너무나 쉽게 욥을 정죄하는 모습이 역력하지 않습니까? 지금 네가 이렇게 징계받는 것도 다 너를 사랑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바로 잡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니 징계받는 것을 복으로 알고 하나님이 너에게 주시는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이른바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교육적인 고난으로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8절 말씀처럼 "자기 같으면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다 털어놓을 텐데" 너도 고집 부리지 말고 혹시 잘못한 일이 있으면 다 하나님께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18절의 말씀, 즉 18 하나님은 찌르기도 하시지만 싸매어 주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지만 손수 낫게도 해주신다. 너의 모든 상처를 낫게 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앞 으로 우리는 엘리바스를 비롯한 세 명의 친구들이 욥과 나누는 대화를 오랜 시간 동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틀림없이 욥의 좋은 친구들로서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친구들의 순수성은 욥 2: 11-13절 말씀에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세 친구들은 욥이 재앙을 만나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마다 집을 떠나 욥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한참만에 욥을 발견한 뒤 소리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공중에 티끌을 날려 머리에 뒤집어썼습니다. 그러면서 밤낮 7일 동안이나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욥의 슬픔을 더불어 나누었습니다. 좋은 친구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러나 그들의 알량한 지식과 전통적인 지혜, 즉 신학과 철학이 문제였습니다. 지금 친구가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짓눌려 있는가보다 욥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을 자신이 전수받은 신학과 지혜, 심지어 영적인 체험까지 총동원하여 해석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면서 자기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교만과 무분별성이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본 엘리바스의 경우가 꼭 그랬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원인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욥 자신이 지은 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고난에서 벗어나려면 죄를 다 뉘우치고 하나님께 겸손히 되돌아가야 한다는 충고를 줍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코 적절한 말은 아닙니다. 옳은 말이라고 해서 다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말은 아닙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지금 욥에게 필요한 말은 이런 류의 신학적인 해석이나 도덕적인 정죄가 아닙니다. 차라리 입을 꾹 다물고 함께 있어주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욥이 이 고난을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더 좋은 위로법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신앙으로 이웃을 함부로 재단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욥기 강해설교(5)  


엘리바스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활을 쏘시니” <욥 6: 1-7: 21>


욥 기 6장과 7장은 엘리바스의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을 향하여(6: 1-30), 청중을 향하여(7: 1-6),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7: 7-21) 각각 대답합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구구절절이 다 옳은 말이기는 했지만 욥이 겪고 있는 처절한 상황에 부합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여,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이론도 소용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원인 없는 결과가 없으며, 그 뿌린 씨앗대로 열매를 거두는 법인데 욥이 이렇게 고난 받는 이유가 다 죄 때문이니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라는 엘리바스의 충고는 욥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죄 지은 사람에게 징벌을 주셔서 다시 바로 설 수 있도록 하신다는, 이른바 고난의 교육용 해석은 더더욱 욥의 형편에 맞지 않았습니다. 이제 욥은 이러한 친구들과 하나님을 향하여 가슴 가득 찬 슬픔과 억울함을 절절히 토해내고 있습니다.


1. 이런 것들이 친구들이라고(6: 1-30)


6 장 말씀을 읽어보면 욥은 먼저 친구들을 향하여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욥을 과녁으로 삼고 마구 독화살을 쏘아대셔서 자신의 영혼이 그 독을 빨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5-7절에서는 자신의 입맛이 다 떨어졌다고 하소연합니다. 7절에 보면 그런 음식들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며 냄새조차도 맡기 싫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고난에 처하면 제일 먼저 입맛부터 떨어집니다. 그래서 입맛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고난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지요. 욥이 당한 그 엄청난 재앙을 생각할 때 일체의 입맛이 떨어진 욥의 입장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8-13절에서 욥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9-1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부수시고 손을 들어 자기를 깨뜨려 주시면 그것이 오히려 위로가 되고, 이렇게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도 그것이 오히려 자기에게 기쁨이 될 것" 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고난이 극심했으면 이런 말을 할까요? 동방의 의인으로서 순전한 믿음을 가졌던 욥이라고 해서 왜 감정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가장 인간적이며 솔직한 욥의 진면목을 만나게 됩니다.


14-30 절 말씀은 친구들에 대한 욥의 서운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미 가장 연장자요 지도급 위치에 있었던 엘리바스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 심문하고 정죄하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욥이 이런 말을 듣고 자기의 결백을 내세우며 격앙해서 외치는 말입니다. 이렇게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친구인데 친구라는 것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15절 말씀 이하에 보면 이 믿지 못할 친구들을 개울의 물살로 비유했습니다. 중동의 개울물이라는 것이 얼음이 녹으면 흙탕물이 흐르고 눈이 녹으면 물이 넘쳐흐르다가도 날이 더워지면 쉬 말라버리고 날이 뜨거워지면 흔적조차도 없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변화무쌍한 개울물에 기대를 걸지만 결국 나중에 낙심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욥은 그 당시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는 대상(隊商)들이 실제로 개울물에 기대를 걸었다가 난감한 일을 당하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욥의 친구들이 이와 같이 변덕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욥의 꼭대기에 서서 선생을 자처해서 전수받은 지혜와 지식, 경험 등을 총동원하여 욥의 고난을 해석하려 하고 심문하고 정죄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이야말로 중동 지역의 개울물이 대상들을 실망시키고 배신하듯이 도무지 믿지 못할 무리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욥은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막 퍼붓습니다. 22-23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욥 자신이 친구들에게 뭘 요구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지요. 이거 내놓아라 저거 내놓아라 한 적도 없으며 친구들의 재산을 뚝 떼어서 목숨을 살려달라고 한 적도 없으며 원수나 폭군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구원을 요청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느 하나라도 친구에게 신세 진 일이 없거늘 친구들은 함부로 욥을 심문하고 판단하는 것을 못내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들에게 던진 욥의 폭탄선언과도 같은 결론이 27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고아라도 제비를 뽑아 노예로 넘기고, 이익을 챙길 일이라면 친구라도 서슴지 않고 팔아넘길 자들이다.” 이 말은 굉장히 과격한 말입니다. 욥 자신의 서운함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으면 이런 말을 다 내뱉었겠습니까?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결백하다고 믿고 있는데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니 욥의 심기가 뒤틀려 버리게 된 것이지요!


2. 그 뒤척거렸던 불면의 밤이여(욥 7: 1-6)


여 러분,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여 밤새 뒤척거리며 새벽이 밝아 오기까지 잠 못 이룬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제 7: 1-6절은 욥이 그 대상을 친구들로부터 오늘 우리와 같은 일반 청중으로 바꾸어서 자신의 아픔을 호소합니다.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밤이었던지 눕기만 하면, 언제 깰까, 언제 날이 샐까 마음 졸이며 새벽까지 내내 뒤척거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무 소망도 없이 종말을 맞는 자신의 절망스러운 상황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3.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구나(7: 7-21)


마 침내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아픔을 토해 냅니다. 적어도 욥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무 잘못도 없이 무고하게 이 엄청난 고난을 당하는데 왜 이와 같은 고통을 주시는지 항의합니다. 11절을 보세요. 욥은 이제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분하고 괴로워서 자기의 불평불만을 다 주님께 토로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할 때 이런 자세가 때로 필요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우리는 가만히 침묵하고 묵종하는 것보다 때로 이와 같은 격렬한 항의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15-16절 말씀을 보세요.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여기 보세요. 욥은 뼈만 앙상해서 살아있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소연합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절규하는 모습과 너무 닮지 않았습니까? 이제 20-21절 말씀을 보세요. 비록 욥이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면 될 터인데 왜 이렇게 과녁으로 삼아서 독화살을 쏘아 대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엘리바스의 첫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대응은 끝이 납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여 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어떻게 돕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엘리바스를 비롯한 세 친구들은 욥에게 선생인 냥 욥의 고난을 해석하고 심문하는 형태의 우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와 같이 선생인척 하는 조언은 정말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참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만일 욥의 세 친구들이 욥과 비슷한 처절한 고난을 당해 본 경험이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지혜 전승이라는 전통적인 입장, 제 3자라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욥의 고난을 해석하고 설교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좋은 친구들이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었을 때, 우리 역시 엘리바스와 같은 입장을 보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둘 째로, 애매한 고난,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좀 더 하나님 앞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욥이 인내하고 겸손했던 초기 반응과는 사뭇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때에도 욥의 의연함, 한결같이 순전한 믿음 등에 적지 않게 감동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때보다 지금 욥의 모습에 훨씬 더 인간미를 느끼지 않습니까? "아, 욥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수 있구나? 하나님과 이웃들을 향하여 자신의 억울한 신세를 마음껏 토로할 수 있구나?" 하면서 더 큰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더욱 솔직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여도 우리의 속마음에 솔직한 것만이 더욱 더 깊고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욥기 강해설교(6)  


빌닷의 첫 번째 공박: “네가 과연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냐?” <욥 8: 1-22>


오 늘 본문 말씀은 욥의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이 욥을 향하여 퍼부은 공박입니다. 빌닷도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세 차례씩이나 욥과 논쟁을 합니다. 그런데 빌닷 역시 엘리바스와 별 차이가 없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필경 욥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이른바 인과율과 추수 법칙론이 다시 한번 욥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빌닷 역시 엘리바스 못지않게 지혜로운 사람이며 높은 경륜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욥에게 선생이나 된 냥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은 지혜와 지식과 경험, 관찰 등을 총동원하여 욥이 저지른 잘못과 죄악을 깨우치게 하여 빨리 하나님께 회개한 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욥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수 많은 재산과 10 자녀들을 잃고 마침내 자신의 건강까지 잃고 빈사(瀕死) 상태에 빠진 욥을 이렇게 코너로 몰고가는 모습은 친구가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엘리바스나 빌닷은 친구가 지금 얼마나 극한 슬픔과 아픔에 빠져 있는가 하는 상황적 이해가 너무 부족합니다. 게다가 여러 세대를 거쳐 전수받은 빌닷의 지혜가 적어도 겉보기에는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지만 문제는 그 일반 원리를 교조화하여 기계론적으로 적용시키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닷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1. 욥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에게까지도 적용된 인과율(8: 1-7)


2절 말씀을 보면 엘리바스와 달리 빌닷의 발언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비판적으로 시작됩니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욥이 엘리바스에게 대꾸할 때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자 욥을 힘껏 다그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빌닷은 욥이 분명히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당한다는 부동의 전제를 가지고 욥을 몰아붙입니다. 자, 그러면서 3절을 보면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으로 욥의 결백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의로운 사람을 상주시고 죄있는 사람을 벌주시는데, 네가 이와 같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네 죄 때문이라는 주장이지요.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와 같은 인과응보의 법칙, 추수의 법칙을 이미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욥의 10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시키는 비정함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네 자식들이 주께 죄를 지으면, 주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욥의 자식들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죄지은 결과로서 욥의 자녀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해석이지요. 얼마나 가혹한 해석인지 모릅니다. 이런 논리가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욥의 상처 난 가슴을 헤집고 후비는 폭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빌닷은 5-7절에서 우리 목회자들이 심방 가서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죄악의 결과로 이미 죽었으니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있는 욥은 이 말씀을 듣고 빨리 하나님께 회개해서 구원받으라는 충고입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그 러나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하면, 또 네가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너를 살리시려고 떨치고 일어나셔서, 네 경건한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잘못 설교했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교우님 가정이 개업을 해서 그저 보통 목회자들이 하듯이 깊은 생각 없이 이 본문을 선택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전화를 해서 과연 이 말씀이 개업 예배에 적절한 본문인지 따지는 것입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면서 "야, 우리 교회에도 꽤 수준 높은 교인이 다 있구나!" 생각하면서 사과했습니다.

 

사 실 다른 성경 말씀이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욥기, 욥기 중에서도 특히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대화 내용은 어느 한 부분만을 싹둑 잘라서 쉽게 설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전후문맥을 잘 따져봐야 합니다. 사실 이 말씀 하나만 놓고 생각하면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요, 새로 시작하는 성도의 사업이나 가정을 축복하기에 안성맞춤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빌닷이 이런 말씀을 욥에게 던지는 배경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결코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던진 말씀이 아니라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문맥이 문제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은 빌닷이 살고 있던 당대에 매우 잘 알려진 지혜의 격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빌닷이 이 말씀을 욥에게 던진 배경이 중요합니다. 빌닷이 말하는 "미약한 시작" 은 죄를 지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나타난 "고난받는 현재의 상황" 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욥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면, 또 욥이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기만 하면 비록 현재는 미약해서 고난을 받지만 그 나중은 심히도 창대한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옳은 말이고 욥기의 결론부를 보면 욥이 실제로 그런 축복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욥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빌닷이 미약한 욥의 현실을 욥이 하나님께 지은 죄악의 결과로서 해석하는 한 이 말씀은 욥에게 고통만 가중시킬 뿐 그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후문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성경의 어느 한 구절만 적당히 발췌해서 상황에 함부로 적용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왕골과 진펄, 갈대와 물(8: 8-19)


자, 이제 8-10절 말씀을 보면 빌닷은 욥이 과거에 지은 죄의 결과로서 현재의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선조들의 경험을 끌어들입니다. 선조들의 지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항상 유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른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정통 신학이라는 것이 도그마(dogma=1. 독단(獨斷) 2. 교회에서 부동(不動)의 진리로 인정되는 교리(敎理)·교의(敎義)·교조(敎條)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가 되어서 기계적으로 아무 구별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때 사람을 얽어매는 또 하나의 사슬이 될 수가 있습니다.


11-19 절 말씀을 보면, 빌닷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지혜 가운데 몇 가지 비유를 제시합니다. 먼저 왕골과 진펄을 비유로 듭니다. 왕골, 즉 골풀은 식물의 일종인데 반드시 진펄, 즉 늪지대에서 자랍니다. 그 다음에 갈대도 마찬가지로 물 있는 곳에서만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물이 빠진 상태에서 왕골이나 갈대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의 핵심은 1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모든 사람의 앞길이 이와 같을 것이며, 믿음을 저버린 사람의 소망도 이와 같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갑작스레 물이 빠져 때가 되기도 전에 말라비틀어지는 왕골이나 갈대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14-1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금방 끊어지고 말 거미줄을 의지하는 사람같고 쉽게 부서질 집을 보호막으로 삼는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결 국 빌닷의 비유는 또 하나의 인과율에 대한 비유입니다. 욥이 명백히 불의한 자이기에 물이 다 빠져 말라가는 왕골이나 갈대와 마찬가지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닷의 비유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참혹한 고난을 겪고 있는 욥에게는 결코 시의적절한 말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적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의 죄성을 파헤치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한 침묵, 아니면 따뜻한 위로 한 마디입니다.


3. 새로운 미래에 대한 약속(8: 20-22)


이제 빌닷의 첫 번째 발언의 결과는 20-22절 말씀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 물리치지 않으시며, 악한 사람 손 잡아 주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네 입을 웃음으로 채워 주시면, 네 입술은 즐거운 소리를 낼 것이니, 너를 미워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악인의 장막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여 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에 욥이 미래에 웃고자 한다면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올바른 삶을 회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욥은 악인의 장막과 마찬가지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희망찬 미래에 대한 설계도 이와 같이 욥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한 상태에서 욥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된다는 조건부적인 것입니다. 이런 일반 논리가 모든 사람에게 차이 없이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순전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서 자기의 죄악과 상관없이 무고한 고난을 당하고 있기에 인과율이 욥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고난당하는 자는 누구나 다 반드시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일반 원리가 문제입니다. 이 원리는 거꾸로 말해서 "현재 모든 것이 형통하는 사람은 죄가 없다." 는 말도 되기에 더 큰 문제입니다. 물론 고난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서 일어난 경우가 많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외도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당하는 무고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른바 정통 신학, 정통 교리를 도그마화해서 무비판적으로 아무 때에나 함부로 적용하는 우(愚)를 범해서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자와 긍휼이지 우리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에 의거한 정죄와 심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해 우리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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